아큐페이즈 DP-57은 2001년부터 2004년까지 활약하다 단종된 DP-55V를 대체하는 최신모델이다. DP-55V에는 아큐페이즈가 꾸준히 적용해온 MDS (Multiple Delta Sigma)가 적용되었었는데 DP-57에서는 이를 좀 더 개선한 MDS++가 적용되었다.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PCM 1796 델타 시그마 컨버터 두 개를 병렬처리하여 한 개만 사용한 것에 비해서 디스토션을 줄이고 노이즈를 감소시킬 수 있다고 한다.
아큐페이즈 CD플레이어답게 디지털 입력을 지원하고 있어 트랜스포트나 D/A컨버터로서도 사용이 가능하다. 디지털 입력은 32kHz, 44.1kHz, 48kHz, 88.2kHz, 96kHz 샘플링 주파수이며 데이터는 16~24비트까지 입력이 가능하다.
그밖에 리모컨으로 게인을 조절할 수도 있다. 게인 조절은 디지털 도메인에서 이뤄진다.
트레이가 닫히면서 CD를 인식하는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무척 빠르다. 이것처럼 빠른 제품을 본적이 없다.
아큐페이즈 DP-57를 사용하면서 유의할 점이 하나 있다. 아큐페이즈 DP-57은 표준 CD규격이 아닌 CCCD(Copy Control CD)는 음질이나 동작의 완전성을 보장하고 있지 않다.
들어보기
아큐페이즈 DP-57을 들으면서 비교한 제품은 소니 SCD-XA9000ES SACD플레이어다. 아큐페이즈 DP-57은 싱글엔디드 접속(RCA)에서조차도 소니보다 음량이 3dB 더 컸다. 비교시에는 볼륨으로 게인을 동일하게 맞춰주었다. 이와는 별도의 시스템에 연결된 dCS P8i SACD도 청취에 참고로 했다.
아큐페이즈 DP-57을 듣게 되면서 처음 느낀 인상은 번쩍거리지 않으며 중후하게 들린다는 것이고 음색은 잘 연마된 것처럼 섬세하고 차분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디지털 제품이 가지는 딱딱함이라던가 거친 소리와는 거리가 멀어도 아주 멀다.
조 모렐로 Going Places 앨범을 재생해 보면 색소폰은 밀도감 있고 꽉 찬 듯이 충실하게 들린다. 필자가 경험한 디지털 오디오 재생기기 중에서 아큐페이즈 DP-57이 그런 면이 좀 더 두드러지게 강조된 것처럼 들렸는데 실제 연주현장에서의 들을 수 있는 악기의 두툼하게 부풀어 오른 충만한 존재감을 감안하면 납득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확인할 점은 원래 녹음이 그 정도의 농익은 풍부함을 가지고 있었는지 여부를 가려보면 될 터이다.
평가하는 입장에서 분석이나 의심하고 확인하는 과정을 밟아야겠고 진단도 내려야겠지만, 그와 다른 관점인 음악을 즐기는 사람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아큐페이즈 DP-57의 그런 풍요로움이 지나쳐서 포화된 것 같은 기분을 준다거나 소리를 압도해서 음악을 해친다거나 자신의 소리를 강요한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게 한다는 점에 일단 안심이 된다.
드럼을 두드리는 타격은 순간적으로 힘이 실리면서도 이탈이 잘 되는 재빠른 순발력을 갖췄다. 그래서 다음 음을 흐리게 만들지 않고 리듬감이 잘 살아난다.
가령 5번째 트랙 Secret Love를 듣고 있노라면 처음에는 앉아서 발장단만 맞추다가 나중에는 결국 일어나서 몸을 흔들흔들 흔들게 만든다. 신들린 연주자의 개인기와 열정 그리고 팀웍이 오디오를 통해서 필자 앞에서 펼쳐지고, 열기가 가슴 속으로 복사(輻射)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런 6분간의 미치게 (도달하게) 만드는 마력 발산을 경험하고 나니 당연히 다른 제품에서는 그런 마력이 살아나는지 궁금해 진다.
소니로 틀어보면 그 연주가 어디로 도망간 것은 아니지만 사람을 지배할 정도로 점화시켜주지 못한다는 걸 깨닫게 해준다. 가볍게 들리고 악기도 슬슬 무난하게 부는 것처럼 들린다. dCS P8i SACD플레이어로 재생(DSD 업샘플링, 디지털 필터 1번 설정)해 봤을 때는 연주의 쾌속난주와 개인 기량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게 해주지만 아큐페이즈 DP-57 만큼의 흥이나 열기가 전달되지는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음에 XLO/Reference Recording 번인 테스트 CD에 실린 13번 트랙 Stormy Weather을 틀어보면 CD 설명에 기재되어 있듯이 나이든 흑인 여성이 부른 노래 소리라는 걸 실감나게 해준다. 그리고 듣는 자리가 돌연히 커피나 술 종류가 필요할 것 같은 재즈카페의 분위기가 감돌게 되는 착각에 들게 한다.
특이한 점은 얼굴의 크기나 구강(口腔)의 규모가 분명하게 느껴지게 한다는 것(하지만 체구가 너무 크게 나오지는 않는다)과 악기들도 여지껏 들어보던 것보다 낮거나 굵게 들린다는 점이다. 소니로 들어보면 아큐페이즈 DP-57에서 잘 감지 되지 않았던 위로 올라가는 소리가 있음을 알게 한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전반적으로 심심하게 들린다.
임희숙 35주년 기념 앨범에 실린 ‘잊혀진 여인’을 틀어보면 세션 악기가 과잉으로 들려서 보컬을 위협하는 것처럼 들린다. 동일 곡을 소니나 dCS P8i에서 들어보면 비록 마스터링이 미숙하여 아슬아슬하게 되어 있지만 세션이 보컬을 많이 위협하지는 않게 들린다. 그런 면에서 아큐페이즈 DP-57는 사람의 보컬을 제외한 특정 저역 대역에서 강조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사랑과 평화 the endless legend앨범에서 이철희씨가 부른 ‘부족한 사랑’을 들어보면 남성의 목소리는 악기의 소리와는 다르게 강조된 부분이 거의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소니는 약간 물이 빠진듯이 힘이 덜 들어가서 점화력이 떨어지는 편이었고 dCS P8i는 DSD 업샘플링을 해제하고 디지털 필터를 4로 놓고 들어보면 호소력이 넘치는 소리를 듣게 해준다. 아큐페이즈 DP-57는 dCS P8i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호소력이 떨어지게 들리는 편이다. 이것은 Animals의 House of Rising Sun을 틀을 때도 거의 비슷하게 느껴진다.
이제는 분위기를 바꿔서 합창곡과 클래식 분위기의 곡들이 어떻게 들리는지 알아봤다.
존 루터의 합창곡 The Lord Is My Light and My Salvation은 밀도감에 강점이 있게 들렸다. 그런데 클라리넷 소리는 제법 살찐 소리로 들린다. 소니로 틀면 소리가 좀 더 가늘어져서 자칫하면 오보에처럼 들릴 지경이었는데 둘 사이의 중간 정도였으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니로 들어보면 좀 더 섬세한 부분이 들리는 것처럼 들렸고 공기감이 차있는 것처럼 들린다. 소니를 팔아야 하는 판매원이라면 이 곡을 틀면 딱이겠다 하는 생각이 들만큼 소니를 돋보이게 하는 곡이 아닌가 싶었다.
피레스-듀메이-황이 연주한 브람스 피아노 트리오를 틀어보면 피아노 소리가 두껍게 들리면서 웅웅대는 것처럼 들린다. 깨끗하게 들리지 않고 첼로 소리도 약간 생경한 느낌이 드는데 이 곡에서는 차라리 부족함이 있는 소니가 과잉한 아큐페이즈 DP-57보다 낫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정도면 아큐페이즈 DP-57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실 수 있을 것 같다. 아큐페이즈 DP-57 사용자가 특별한 보정을 하지 않고 사용한다고 가정하면 두툼한 소리가 나와주는 시스템과는 그리 좋은 상성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케이블 종류로 살짝 보정을 시도해 본다면 좀 더 다양한 시스템과 매칭이 가능할 것 같다. 그래서 인터커넥트 선재는 동일하지만 단자를 바꿔서 색다르게 튜닝된 것을 가지고 어떻게 들리는지 시도해봤다. 지금까지 사용했던 것은 몬스터 케이블 스튜디오 프로 1000 선재에 불렛플러그 (베릴륨동 버전)이었는데 새로 시도해 본 것은 은단자 버전 불렛플러그다. (단자에 따른 특성 차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블로그에 시청소감이 실려있다.)
그러고 나자 브람스 피아노 트리오에서는 피아노의 붓기가 빠져들었고, 존 루터의 합창곡에서는 클라리넷의 두께가 적당해졌다. 그리고 타이타닉 메인 타이틀 송인 My Heart Will Go On에서도 부족했던 촉촉함이 더해져서 윤기 있고 반짝이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아무래도 이 제품을 튜닝한 사람은 은선 인터커넥트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무리
아큐페이즈 DP-57은 훌륭한 만듦새를 가졌고 게인조절 디지털 신호 입력 등 확장성도 뛰어나다. 그리고 음악을 맛깔스럽게 즐길 수 있게 해주는 개성을 가지고 있으며 음악에 몰입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 성숙하고 정성스런 튜닝이 들어가 있음을 알게 해준다. 혹시라도 자신이 주력으로 듣는 음악에 맞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매칭에 노력을 하면 충분히 가까워질수 있지 않을까 싶다. 경쟁할만한 미국이나 영국제 디지털 오디오 재생 제품에 비해서 규모감이 떨어지지 않는데다가 디테일은 좀 더 나으면 나았지 떨어지지 않는다고 본다. 본격적인 멀티채널이 아니더라도 2채널로 가볍게 영상물까지 감상하는 사용자라면 PCM 디지털 신호 입력이 지원되는 아큐페이즈 DP-57의 확장성에 특히 더 눈여겨볼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