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국내 애호가들에게 클라세의 이미지는 아주 비싸지 않으면서도 출력과 성능이 좋은 앰프 브랜드였던 것 같다. 2000년도에 출시한 오메가와 오미크론 시리즈에 이르러 클라세가 하이엔드 사용자들에게도 크게 인정 받게 되었다. 최근 바우어즈 앤 윌킨스에 인수되면서 내놓은 델타 시리즈는 만듦새와 디자인, 그리고 서비스에서도 본격적인 하이엔드로의 진출을 선언한 제품이다.
일렉트로닉스 회사라고 해도, 소스, 프리앰프, 파워 앰프의 모든 부분을 돋보이게 잘 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클라세의 경우 파워앰프가 가장 큰 인기를 모았고, 소스 기기들도 일체형 CD 플레이어와 DA 컨버터 등이 꾸준히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90년대부터 프리앰프 분야는 중급에서 고급 제품에 이르기까지, 진공관 제품들이 우세했고, 파워앰프와 직결이 가능한 소스 기기들이 등장하는 가 하면, 또 DVD 플레이어가 등장한 90년대 말 이후로는 AV 프로세서 시장과 혼합되는 등 시장 상황의 급격한 변화가 진행되었다. 클라세도 그 동안 SSP 시리즈의 서라운드 프로세서에 보다 주력하면서 프리앰프 분야에는 다소 소홀한 느낌이었다.
클라세가 델타 시리즈의 프리앰프인 CP-500을 출시하면서, 강조한 것은 터치 스크린을 통한 디자인과 조작성에서의 개선이었다. 그러나 내용이나 가격적으로 봤을 때에는, 클라세의 보급 기종에서 고급 기종까지 모두 커버하기를 바라 기에는 버거운 편이었다. 특히 최상급 기종인 400와트 출력의 M400을 구동하기에는 CP-500이 너무나 왜소해 보인 것이 사실이다.
사실 클라세에서는 처음부터 전원 부 분리형의 하이엔드 프리앰프를 기획했고, 완성도 높은 제품으로 소개하기 위해 시간이 많이 걸렸을 뿐이다. 이렇게 해서 최근 출시된 CP-700 프리앰프는 제작사의 설명에 따르면 “정말 프리앰프다운 프리앰프를 만들었다”고 할 만큼 내용이나 음질에서 뛰어난 성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제품 가격도 CP-500보다는 2배나 높게 책정되어, 실질적인 플래그십 프리앰프로 제작된 제품이 아닐까 싶다.
제품 소개
Classe CP-700 Preamplifier
디자인이라든지 기능, 사용 편의성에 대한 설명은 CP-500과 많은 부분이 동일하다. 겉보기에 다른 점이라면, 후면의 밸런스드 출력이 한 조가 추가되었고, 별도의 유닛으로 전원부가 분리되었다는 정도 일 듯. 하이파이넷에 게재된 이전 CP-500/CA-2200의 기사(http://hifinet.co.kr/index.php/hifi/cp_500_ca2200_1/)를 참조해주시면 좋을 듯 하다. 별도의 전원부는 델타 시리즈의 디자인은 아니고 단순하게 철판을 구부려 만든 것으로 상당히 평범하게 생겼다. 아무래도 랙 뒤에 놓고 숨겨서 사용해야 될 것 같다.
CP-500과 마찬가지로 푸른색의 터치 스크린이 백색의 알루미늄 새시를 배경으로 은은하게 빛난다.조명이 어두운 상태에서 보면, 이전 검은색 위주의 하이엔드 제품들과 다른 세련미를 느끼게 한다. 디스플레이에는 포노/라인/테이프 입력과 볼륨 레벨까지 표시되어 있다.
클라세 프리앰프의 볼륨은 사용자의 필요에 따라 응답 감도를 조정할 수 있다. 간단히 설명하면, 섬세한 음량의 조작이 필요한 경우라면, 볼륨을 보다 천천히 돌아가게 할 수 있고, 감상 즉시 원하는 음량을 얻기 원한다면, 조금만 돌려도 음량이 쉽게 커지게 할 수 있다.
포노 입력은 별도의 포노 모듈(CPM: Classe Phono Module)로 대응하며, 모듈이 설치된 경우에는 해당 메뉴가 터치 패널에서 자동적으로 활성화된다. MM/MC 카트리지의 설정도 메뉴에서 가능하다. 저출력(MC)과 고출력 (MM) 카트리지의 증폭도는 각기 72dB과 42dB이다.
AV 프로세서와 연결을 위한 바이패스 기능은, 입력 이름을 ‘SSP(surround Sound Processor)’로 하여 설정한다. SSP로 입력 이름을 변경한 상태에서 선택하면, 볼륨 표시가 사라지면서 입력 신호의 레벨만큼 출력되는 ‘동일 게인(unity gain)’ 상태가 된다.
패널 좌측의 메뉴 버튼을 누르면, 시스템 셋업 메뉴로 들어가는데, 여기서 각 입력의 이름, 그리고 옵셋과 밸런스 등을 조절할 수 있다. LCD 패널의 밝기라든지, 타임아웃, 언어 등도 조정 가능하다(단, 한글 메뉴 지원은 되지 않았다 ).
클라세가 제시한 규격에 따르면, THD 수치가 CP-500의 0.03%에 비해 0.0012%로 크게 낮아진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아마 별도의 전원부를 분리하면서 얻어진 효과일 것으로 생각된다.
클라세 홈페이지에는 본 제품의 설계 개념이 소개되어 있다. 우선 프리앰프는 소스 선택과 볼륨 컨트롤 기능을 갖고 있는 제품이지만, 물리적 진동이나 전자기적 간섭 같은 외부 환경 때문에 그런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또 오디오 회로가 완전한 성능을 내기 위해서는 깨끗하고 안정된 전원이 필요한데, CP-700는 바로 이 부분에서 극도로 정성을 기울인 제품이라는 것이 클라세의 설명.
CP-700의 전원부는 교류 전원의 잡음을 엄격히 제한하도록 만들어졌고, 반대로 프리앰프에서 발생한 노이즈가 벽의 전원으로 유입되는 일이 없도록 초크를 사용했다고 한다. 트랜스포머는 모두 3개를 사용했는데, 둘은 작고, 하나는 크다. 작은 트랜스포머 둘 중에, 하나는 교류 전원의 전압과 위상을 감시하는 회로에, 하나는 센서와 로직 회로에 전원을 공급하는 데 사용한다.
오디오 회로에 전원을 공급하는 트랜스포머는 135VA 용량으로, 5개의 2차 권선을 갖고 있다. 하나는 컨트롤 회로를 위한 것이고, 나머지 4개는 좌/우 채널의 +/-에 직류 전원을 공급한다. 4개의 오디오 채널에는 고속 쇼트키(schottky) 다이오드를 사용한 전파 브리지 정류기를 썼고, 각각은 OSCON 저 ESR(low equivalent series resistance) 커패시터로 바이패스했다. 또 4개의 직류 레귤레이터로 각 채널에 필요한 +/- 전압을 만들고 있다.
좌우 채널의 기판은 새시의 서로 반대쪽으로 분리되어 신호 간섭을 배제하고 있다. 하위 기종인 CP-500과 달리 싱글 엔디드 신호도 밸런스드 신호로 변환하여 동작하며, 완전히 대칭적으로 같은 경로 길이를 가지므로 밸런스드 구성의 이점을 누릴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감상
시청에는 에소테릭의 P-03/D-03 SACD 플레이어와 아포지의 미니 DAC, 마란츠의 SA-11S1 SACD 플레이어를 소스기기로, 클라세의 M400 모노 블록을 파워앰프로, B & W 800D를 스피커로 하고, 마지막으로 스피커 비교 시청을 위해 BAT의 VK-51SE 프리앰프를 사용했다.
하이엔드 시스템의 경우 워낙에 고가 시스템이다 보니, 약간의 소리 차이마저도 굉장히 크게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에소테릭의 D-03 D/A 컨버터와의 연결은 불운하게도 성공적이지 못한 편이었다. 두 제품의 성향이 모두 차분한 경향이어서 그렇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D-03을 다른 프리앰프에 연결했을 때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클라세 CP-700에 연결했을 때 만큼은, 소리가 전반적으로 굳어지고, 생동감과 활력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 둘은 다른 구성 기기가 자신의 소리를 강하게 내는 일이 없도록 가라앉히는 지휘자의 역할을 맡은 셈인데, 둘이 합쳐지니, 결국 구성원들이 뭔가 해볼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앗아가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오히려 저렴한 아포지의 미니 DAC를 에소테릭의 P-03에 디지털 동축 방식으로 연결했을 때에는 이 시스템의 역량에 기대했던 대로 최상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전혀 가격적인 밸런스는 맞지 않지만, 이 상태에서 CD 소스로 대부분의 시청을 진행했다. 참고로 미니 DAC에는 더블 밸런스드 입력이 있어서, 에소테릭의 트랜스포트라면 176.4kHz로 업샘플링을 해서 전송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시간 부족으로 시도해 보지 못했다.
클라세 CP-700 프리앰프의 가장 큰 특징은 정말 배경 잡음 없이 조용하고 깨끗한 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클라세의 주장대로 전원부에 많은 물량 투입이 이루어진 덕분인 지 모르겠으나 뿌연 잡음으로 귀를 거슬리게 하는 일이 절대로 없을 듯 하다. 따라서 어떤 음반을 걸더라도 원하는 만큼의 순수한 소리만 빠져 나오는 인상이 되고, 절대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일이 없었다.
CP-700의 고음은 특별히 언급할 만한 특징을 지니지 않을 만큼 중립적이고, 일부 진공관 앰프처럼 독특한 음색을 더하지 않는다. 반대로 일부 솔리드스테이트 앰프처럼 약간의 왜곡을 감수하고 소리를 과도하게 부각시키는 느낌도 없다. 그래서 소리가 어둡다거나 아니면 너무 밝다거나 그런 표현을 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물론 소리가 앞으로 튀어나오는 일은 전혀 없고, 스피커 사이에 모든 음원이 상세하게 좌우로 진열된다. 표현되는 악기나 보컬의 질감이 우수하며, 잘 연마되고 매끄러운 느낌을 준다.
다시 음색 이야기로 돌아가며, 바이올린이나 피아노의 고음을 들어보면 원하는 만큼 선명하고 디테일도 충분히 들려주지만, 이를테면 칼날을 세운듯한 예리함이라든지, 얼음처럼 맑고 투명하게 울리는 소리가 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진공관 앰프가 만들어 내는 클라세의 기술진들은 정직한 소리를 추구했을 뿐 귀를 혹하게 하는 능력은 부여하지 않은 듯 하다. 대신에 매끄럽고 부드러운 소리로 오래 음악을 감상하는 데 적합하다.
사실 CP-700은 저음에서 고음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음질 성격을 갖고 있어서 구분해서 설명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다. 특히 중역대는 고음의 음색과 질감을 그대로 유지하는 경향이다. 물론 진공관 프리앰프와 비교해 본 결과는 조금 더 나긋나긋하고 보다 유연한 소리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물처럼 자연스럽게 흐르는 소리는 역시 진공관 앰프의 영역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또 반대로 진공관을 사용한 파워앰프와 사용했을 때에는 소리 전체를 정확하게 컨트롤하는 CP-700의 장점이 보다 더 잘 살아날 수도 있을 것 같다.
저음은 깊고 선명하며 바닥까지 부풀음 없이 차분하게 잘 통제되어 있다. 에소테릭 D-03과 연결된 소리는 조금 무겁게 가라앉는 경향이었고, 아포지의 미니 DAC와 연결하면 소리가 다소 떠오르게 된다. 어떤 경우에도 음량을 상당히 올린 상태에서 어쿠스틱 기타나 더블 베이스의 소리가 정확하게 컨트롤 되어 아주 작은 음량에서 대음량까지 정확한 밸런스로 멋지게 재생된다. 볼륨을 내린 상태나 올린 상태에서나 특정 악기가 돌출하는 일이 전혀 없다.
이미징과 음장 재생 능력에서도 CP-700은 기대를 충족시킬 만큼 탁월했다. 하위 기종인 CP-500 프리앰프에서는 스테이지의 폭이 제한되어 있는데다가, 전체적인 소리를 가볍고, 멀게 들리게 하는 특징을 갖고 있지만, CP-700에서는 제대로 된 사운드스테이지와 충분한 존재감이 구현된다.
물론 400와트의 모노 블록 파워에다가 앰프에 B & W의 실질적인 최고급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800D가 연결된 덕을 입기는 했지만, CP-700은 눈을 감으면 마치 앞에 콘서트 홀의 무대가 그려지는 짜릿한 경험을 하게 해주었다. 귀를 기울여 들어봐도 악기가 연주되는 무대 어느 곳이 허술하게 빈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또, 값비싼 일부 브랜드의 제품처럼 인공적으로 만들어 내는 괴상한 소리가 들리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필자는 이 전체 시스템 만큼 소리에 마냥 빠져들 수 있는 시스템을 들어 본 기억이 드물다. 나중에 B & W800D 리뷰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음량을 크게 올렸을 때에도 소음량에서의 미묘한 질감과 악기 사이의 물리적인 공간이 고스란히 유지되는 데에는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CP-700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성능을 제대로 알아보게 된 것은 나중에 프리앰프를 교체해서 들어봤을 때였다. 전체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소리에 CP-700의 장점이 상당 부분 기여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결론
CP-700 프리앰프는 최상급 솔리드스테이트 프리앰프에 요구되는 음질의 모든 부분들을 충실히 갖추고 있다. 최고급 제품답게 정숙하고, 우아하며, 차분하고, 부드러운 소리를 낸다. 이전 제품과 달리 클라세 파워앰프에 구색으로 맞춰진 제품이 아니라 본격적인 하이엔드 프리앰프로 재 탄생된 것이다. 잘 어울리는 소스 기기와 매칭된다면, 다른 어떤 파워앰프에서도 한 번쯤 사용을 고려해볼 만한 제품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클라세의 다른 델타 시리즈 제품이 그렇듯이, 만듦새나 디자인에서는 검은색 쇳덩이를 고집하는 다른 하이엔드 오디오의 분발이 요구되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다만, B & W가 인수해서 내어놓은 클라세 델타와 B & W시스템의 소리는 분명히 사용자가 개입해서 자신의 소리를 추구하는 오디오파일적인 관점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를 비춰주는 모니터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다. 클라세의 CP-700도 이 부분에서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오디오 적인 재미를 추구하기보다는 음악을 소중히 재생한다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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