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T에 대해서
BAT의 설립자는 스티브 베드나르스키(Steve Bednarski)와 빅터 코멘코(Victor Khomenko) 두 사람이다. BAT의 제품 설계는 러시아 페테스부르크 출신의 빅터가 담당하고 있다. 빅터는 어렸을 때 진공관 제조 업체로 유명한 스베틀라나 공장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서 자랐는데, 8살 때 이미 라디오를 조립했을 만큼 오디오에 관심이 많았다. 고등학교 때에는 스베틀라나 공장에서 버린 부품들을 모아서 릴 녹음기를 제작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레닌그라드 폴리테크닉 인스티튜트에서 물리와 전자를 공부했고, 젊은 시절 단돈 400달러를 들고 미국에 단신으로 건너왔다. 빈손으로 건너 왔지만, 얼마 되지 않아 HP에 입사하여 실험 장비를 설계하게 된다. 빅터가 HP에서 개발했던 스테로이드 측정 장비는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남자 육상 100미터에 출전한 벤 존슨을 실격 처리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동업자인 스티브는 명문 코넬대에서 학위를 받고 하바드에서 MBA를 마친 수재다. 스티브는 HP에서 생산과 마케팅, 계측기 설계 등 다양한 분야를 맡은 덕분에 BAT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HP에 근무하던 시절 두 사람은 모두 오디오 애호가로서 평소에 많은 의견을 나누었다. 그러다가 스티브가 구입한 밸런스드 회로 방식의 프리앰프가 좋은 소리를 낸다는 화제에 이어 빅터가 완벽한 밸런스 동작의 프리앰프를 설계한다. 이것이 BAT가 출발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BAT는 회사 이름이 강조하는 것처럼 모든 제품에 밸런스드 구성을 채택하고 있다. 이러한 완벽한 밸런스드 구성은 BAT 이전에는 모든 부품을 2배로 사용해야 되기 때문에, 업체들이 선호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고, 무척 비싼 제품으로 소개되었다. 그러나 빅터는 그와 달리 스테이지와 버퍼링의 단계를 줄이면서 밸런스드 구성을 채택함으로써 그런 비용 상승을 상쇄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즉, 밸런스드 방식의 제품이라고 해서 반드시 비싸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BAT의 제품은 최단 신호 경로와 밸런스드 회로 구성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으며, 가격도 다른 메이커에 비해 상당히 합리적이다. 대신에 빅터는 회로 자체가 완벽하게 설계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가급적 여러 번 측정을 반복해서 회로를 철저하게 검토하고, 그런 바탕 위에 좋은 부품을 고르고, 청취 테스트를 해서 제품을 완성시킨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제작자가 엔지니어 출신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BAT의 제품은 어디에서도 소비자를 현혹시키려는 인상이 들지 않는다.
또 하나의 특징은 다른 업체와 달리 BAT는 진공관과 솔리드스테이트 어느 한 분야로 기울지 않은 또 다른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에 대한 빅터의 입장은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이 그렇듯이 어느 하나가 우월하다기보다는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하도록 공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은 튜브 디자이너가 아니라 일렉트로닉스 디자이너라고 생각하며, 어떤 소자로 설계하더라도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VK-51SE 프리앰프
VK-50SE의 후속 기종으로 등장한 플래그십 모델인 VK-51SE 프리앰프는 VK-150SE 파워앰프와의 조합으로 2003년 CES에 처음 선을 보였다. 또, 그 해 스테레오파일의 11월호에 리뷰어인 Paul Bolin에게 크게 호평 받은 바 있다. 스테레오파일에서는 Mark Levinson, VTL, Halcro 등과 함께 현존하는 최고의 프리앰프 중 하나로 꼽을 정도로 VK-51SE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또 VK-51SE는 이 중에서 가장 저렴한 제품이기도 하다. 물론 VK-51SE는 추천 기기 중 A등급으로 올라있다.
VK-51SE 프리앰프는 출시된 지 2년이 지난 2005년에 이르렀기 때문에 리뷰하기에 많이 늦은 편이다. 그렇지만 하이파이 제품의 수명은 매우 길게 마련이다. 게다가 BAT는 그리 규모가 큰 업체가 아니기 때문에, 신제품을 내놓는 데에도 그리 재빠른 편은 아니다. VK-51SE의 사용자로서는 당분간 신제품이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뿐이다.
BAT의 프리앰프는 1994년에 VK-5 라인 스테이지로 시작되었고, 그 후 조금씩 개량되면서 여러 파생 기종들이 선보였다. 현재는 VK-3iX, 20, 30,, 40, 31SE, 51SE의 6개 기종이 생산되고 있다. VK-50에서 50SE로 진화하면서 트랜스포머가 대용량으로 변경되었고, 파워 서플라이의 에너지 용량을 확대하는 BAT 고유의 Super-PAK(사진에서 노란색으로 보이는 오일 커패시터) 처리가 적용되었다. 이의 효과는 BAT에 따르면, 필름 커패시터를 사용한 것에 비해 전 대역에서의 매끄러움이 보다 강화되었다고 한다. 51SE에서는 파워 에너지의 저장 용량을 325joules로 한층 높였는데, 이는 프리 앰프에서는 유례가 없는 것으로, 오히려 파워앰프 수준에 가까운 것이다. 이를 통해 다이내믹 성능이 보다 우수해졌다,
VK-50에서 BAT는 슈퍼 튜브로 알려진 트윈 트라이오드 진공관 6H30을 탑재하기 시작했다. 이 튜브는 고전류, 저 임피던스의 군용 규격으로, 오디오에 사용했을 때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VK-51SE은 앞서 말한 것처럼 싱글 스테이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글로벌 피드백을 사용하지 않는다. 입력에서 출력까지 완전한 밸런스드 구성이다. 입력 단자는 5개이며, 프리 출력은 2개로 바이앰핑에 활용할 수 있다. 모든 단자가 밸런스드 타입이기 때문에 처음 보기에는 상당히 난감할 것이다. 심지어 튜너까지도 밸런스 입력 단자로 되어있다. 물론 XLR-RCA 어댑터를 어렵지 않게 구입할 수 있고, 언밸런스드 제품과 연결하더라도 전혀 음질적으로 문제가 나타나지 않는다.
외관 역시 좌우의 균형이 잘 잡힌 밸런스드 테크놀로지다운 구성이다. 큼직한 LED 디스플레이를 중심에 두고, 소스 선택 버튼과 기능, 위상, 뮤트 버튼 등이 자리 잡고 있다. 기능 버튼을 사용해서 입력 소스에 맞는 최대 레벨, 모노/스테레오, 고정 게인 등을 설정해 놓을 수 있다.
볼륨 컨트롤은 0.5dB 간격으로 적용된다. 리모컨은 옵션으로 되어 있는데, 국내 수입 제품은 리모트 컨트롤이 기본으로 제공되고 있다. VK-51SE 역시 다른 진공관 프리앰프들과 마찬가지로 출력 임피던스가 410옴 정도로 높은 편이다. 따라서 파워 앰프 매칭에 대해서는 입력 임피던스가 높은 제품이 적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당히 많은 열을 내기 때문에, 충분히 열을 식힐 수 있도록 공간을 확보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시청평
전체적으로 VK-51SE는 진공관과 TR 앰프의 특색을 서로 섞어 놓은 듯한 앰프라는 인상을 준다. 앰프의 성격은 기본적으로는 대단히 너그럽고 부드러운 소리를 내는 성향을 지닌다. 모든 진공관 앰프들이 대개 그렇지만, 이 앰프의 음색은 물처럼 유연한 질감을 지니고 있다. 어느 한 곳이 걸리거나 거칠게 느껴지는 일이 없다. 마찬가지로, 바이올린이나 소프라노의 고음에서는 예리하게 쭉 뻗는 느낌이 적고, 특정 대역이 강조되는 일이 없어서 차분하고, 자연스럽게 들리는 편이다.
얼마 전에 호평한 마크레빈슨 No.326 같은 현대적인 솔리드스테이트 프리앰프와 비교하면 고역의 극단에서는 소리가 조금 롤 오프되어 있다. 그래서 일부 앰프에서 고음이 하얗게 들뜨는 것과는 반대로 언제까지나 약간 그늘이 드리워진 듯한 내성적인 표현을 지니는 편이다. 물론 과거 빈티지 제품처럼 대역폭이 좁아서 나타나는 투박하면서 메마른 어두움이 아니라는 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VK-51SE가 재생하는 전체 대역의 모든 부분에서 유연하고 부드러운 질감을 지니고 있다. 즉, 이전에 다른 진공관 앰프나 TR앰프와 같은 영역으로 분류하기 곤란한 독특한 특색을 지닌 셈이다.
같은 이야기지만 자디스 같은 일부 진공관 앰프에서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화성적인 착색이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솔리드스테이트 앰프인 No.326이 더 윤기가 잘잘 흐르는 듯한 유려한 소리를 들려주는 것 같다. 필름 커패시터 대신에 페이퍼 오일 커패시터가 사용된 때문인 지 모르겠다. 현이나 목관 악기의 소리를 좀 더 화사하고 이쁘게 듣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적합한 선택이 아닐 것이다. VK-51SE 프리앰프에서는 음색의 채도가 상당히 빠져 그레이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전반적으로 고음의 컬러에서는 오히려 TR 앰프 쪽에 가깝다.
반대로 저음은 특별히 무겁게 들리거나 하지 않고 자연스러우면서 조금 폭이 넓고 풍성하다는 인상이 있다. VK-75SE에 직결 가능한 DAC를 연결해서 비교해 본 결과, VK-51SE가 소리를 약간 무겁고 풍성하게 들려주는 성격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타악기의 어택은 조금 느리고, 대신에 풍성하게 들린다. 관현악곡을 감상해보면 오케스트라의 악기들이 합주할 때 내주어야 할 스케일이 잘 살아나는 편이다. 드럼의 연타에서도 눈 부실 정도로 팍팍 스피커가 울리고 제동되는 짜릿한 느낌은 주지 못한다. 즉, 고음과 반대로 저음에서는 진공관 앰프의 특성을 많이 지닌 편이다. 만일 고음에서는 밝고 화사한 음색, 저음에서는 팽팽하고 날렵한 소리를 원한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셈이다. 반대로 수준급의 해상도를 지니면서도 차분하고 오래 감상할 수 있는 소리를 원한다면, 바로 VK-51SE가 유력한 후보가 될 수 있다.
아마도 VK-51SE의 음질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많은 진공관 앰프가 그렇듯이 상당 시간의 워밍업이 필요하다. 온/오프 스위치를 겸하는 스탠바이 스위치가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제품을 오프하려면 스탠바이 스위치를 잠시 누르고 있으면 된다. 전원을 넣고 바로 켜 놓은 상태에서의 소리는 물론 제품의 기본이 있으니, 수준급의 소리기는 하지만, 앞서 언급한 그늘 진 음색 때문에 가격에 어울리는 아주 특별한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스탠바이 상태에서도 진공관이 켜져 있어서 상당한 열을 낸다는 점이다. 에너지 절약 시대에는 좀 부담스럽다.
집에 들어오는 전기를 시간을 들여 아낌없이 태워가며 적어도 5~6시간 이상 켜 놓았을 때에는 그만한 보답이 기다리고 있다. 누구도 이 전에 다른 앰프에서는 들어보지 못했을 법한 환상적인 3차원적인 이미징과 한 단계 더 높아진 매끄러움이 눈앞에 나타난다. 앞서 언급했던 그늘진 음색도 아주 미세하지만 더 활기 있게 변화하고, 저음도 좀 더 조여 져서 생기를 되찾는다. 그 차이는 정말 미묘한 정도지만, 전체적인 인상은 전혀 다른 것이 된다. 고요한 음장은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 음장이 자연스럽게 넓게 펼쳐지고, 그 속에 소리의 이미지들이 살며시 피어 오른다. 여성 보컬을 들어보면 넋을 잃고 듣게 될 정도로 정밀하고 생생한 사운드스테이지가 눈앞에 드러난다. 관현악곡의 재생에서는 감상자 바로 앞에 오케스트라가 놓여진 듯한 거대한 무대가 펼쳐진다. 이런 큰 규모의 음장감이 비틀려진 느낌 없이 자연스럽게 제시되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그야말로 손에 꼽을 정도로 제한된 특급 제품이 아니면 다다를 수 없는 경지일 듯 하다.
시청 기기
CDP : Meridian G08
AMP : Mark Levinson No.326, Classe CP-500, CA-2200, BAT VK-75SE
Speaker : B&W802D, Thiel CS2.4, B&W 704, Totem Model 1 Signa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