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한주(raker@hifinet.co.kr) 2002-08-04 09:40:07
레가는 수년전에 플라넷이라는 CD플레이어를 내놓아 국내외에서 열렬한 호응을 받은바 있었다. 주피터는 플라넷의 상위 CD플레이어였는데 이것 역시 플라넷2000과 함께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했다.
실제 판매가격 : 230만원
이전의 주피터CD플레이어는 마치 군용장비처럼 보이는 거무데데한 외관이었는데 비해 주피터2000CD플레이어는 좀 더 날렵하고 스타일리쉬한 모양으로 변경되었다. 바닥은 상당히 묵직한 알루미늄 덩어리로 되어 있어 내부에서 발생된 열방출을 돕는것과 동시에 기계장치부를 흔들림 없이 지지하는 기계적 안정성을 더하도록 고안되었다.
내부에는 주문제작한 24비트급DAC칩을 채널마다 하나씩 사용하여 이중차동구동시키고 있어 채널간의 분리도 향상과 미소신호에서의 처리능력을 향상시키도록 고안되었다. 파워서플라이는 여유있는 용량의 토로이덜 트랜스포머를 사용했는데 7개로 분기를 주어 소니제 메커니즘부, PLL부, DAC 디지털-아날로그부, 마이크로 콘트롤러부, 디스플레이부, 아날로그 증폭과 필터부로 분리하여 공급한다.
주피터2000은 CD플레이어의 음색을 듣기싫게 만드는 원흉으로 지목되어온 지터(jitter)를 줄이기 위해 디지털 클럭부에 많은 공을 들였다. 안정적인 클럭을 발생하는 오실레이터를 채용하는 한편, 데이터-비트 클럭-워드클럭을 재정렬해주는 PLL회로를 위해서 신호경로를 이중으로 레귤레이트시킨 전원을 할당해줬다.
DAC 이후의 증폭에는 DC서보 컨트롤이 사용되었다.
참신하고 아이디어 넘치는 탑로딩 방식도 음질지향주의와 사용상의 편리함을 동시에 만족시키려 한 시도이다. 타회사의 기함급 CD플레이어나 트랜스포트의 상당수는 음질의 고려를 위해 트레이 방식의 로딩방식을 피하고 탑로딩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방식은 실제 사용해 보면 뚜껑을 열고 클램프를 얹어서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번거롭고 불편하다. 레가에서는 클램프와 뚜껑을 결합시켜 사용을 편하도록 해줬다. 탑로딩방식에서 단점이 있다면 장난꾸러기 자녀가 있는 집에서 자녀가 그 안에 무언가 비밀스럽고 아끼는 것을 집어넣어야 겠다는 참기 힘든 유혹을 유발시킬수 있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제품 전체 곳곳에 스며있는 이런 철저한 엔지니어링과 노력을 기울인 성과는 그만큼의 음질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전체적인 소리의 특징은 특별히 강조되지 않은 차분한 음색을 가지고 있다. FMJ CD23만큼 화려하고 통통대고 탁 트여진 것 같은 청량감을 주지는 않는다. 그에 비한다면 담담한 스타일이고 원래 소리를 충실하게 이끌어내려는 성향을 가졌다.
고역이 강조된 스타일이 아니어서 한번에 신경을 확 잡아끄는 성질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비록 매장에서 들어볼 수 있는 단기간의 청취상황에서는 불리할 수 있는 사항이지만 단번에 집중하도록 강요하게 하는 제품이 대금을 치르고 집에 들어와서 영원히 좋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들께서도 경험이 있으리라 믿는다.
주피터의 튀지 않는 진중한 성향이 좋은 방향으로 가장 잘 드러났던 것은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에서였다. 아캄 FMJ CD23은 주제 아리아가 무척 건성으로 묘사되는 것처럼 들려서 3분여의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지는데 반해서 주피터2000에서는 음악의 세부를 찬찬히 여유를 가지고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해주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버나드 하이팅크 지휘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1번 2악장을 들어보면 타악기군의 난타에도 불구하고 저역의 페이스가 엉기거나 떨어지지 않았다. 음악이 추진력이 강조되어 들리지는 않는 편이며 그보다는 음악의 얼개가 잘 들리는 편이며 마치 공연장의 꼭대층에서 듣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필자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을 연주회장에서 러시아 악단의 연주로 들어본 적이 있었는데 금관악기들이 상당히 생생하고 에너지에 차 있고 화려한 소리였다고 기억난다. 그런 기준으로 놓고 보면 주피터2000의 튜닝은 다소 안정지향적인 셈이다. 물론 음반녹음에 무관하게 어둡게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 녹음에 따라 에너지가 넘치게 들리고 줄어드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는것으로 보아 주피터2000은 음악의 생기를 없애버리는 엉터리 CD플레이어와는 엄연히 구별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조금 더 음악의 생동감에 다가가서 잘 느끼기 위해서는 고역의 정보가 좀 더 전달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 반면에 주피터2000이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재생음의 중량감과 부피감에 대해서다. 트랜스포트부가 빈약한 CD플레이어의 경우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치명적인 문제점은 재생음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인데 주피터2000에서는 그런 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높은 성부의 금관악기의 흐름뿐만 아니라 높은 성부에 의해 가려지기 십상인 낮은 성부의 금관악기의 운율까지도 잘 짚어서 표현해 줄 수 있다. 주피터2000을 통해서 표현되는 금관악기의 음색을 비유해서 묘사하자면 동판을 부조로 처리한 후 화학약품으로 에칭시킨 다음에 사포와 연마제를 바른 가죽으로 정성 들여 닦아낸 표면에 부드러운 광선이 비춰져서 반짝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주피터2000의 음색이 사실감이 느껴지는 입체적인 부피감을 가진 중후하고 고급스런 느낌이라면 최근 화제작인 스텔로 200SE에 대한 음색의 기억은 빛이 클래식 진로소주병의 유리를 통과한 것처럼 반짝거리는 환영 같은 투명감이다. 물론 개인의 취향에 따라 어떤 음색을 좋고 싫어함이 있는 것이 사람성격만큼이나 다양하다고 하지만 필자는 이왕이면 주피터2000의 건실한 음색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판매가가 절반에 불과한 플라넷2000에 비하면 주피터2000은 거의 모든 면에서 한단계 이상 향상된 성능을 가지고 있으며 그 차이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느껴졌다. 해상력도 향상되었고, 정보량이 많아짐을 느낄 수 있으며 보다 환해진 듯한 느낌을 준다. 그에 따라서 음악의 흐름이 잘 느껴지며 음악에 대한 집중력도 향상된다.
주피터 2000은 아캄 FMJ CD23T나 스텔로 CDA200SE정도의 이른 바 좋은 가격대 성능비를 갖춘 CD플레이어를 구입하려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구입리스트에 올려서 들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은 동급대의 수작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다만 경쟁제품에 비해서 리모컨의 조작감이 썩 좋지 않고, 플라스틱 전면패널을 갖춘 외관이 음질만큼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점이 있다는 점이 흠이라면 흠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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