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한주(raker@hifinet.co.kr)
새로운 기술이나 문물을 수용하는 데에는 사람마다 독특한 패턴이 있다고들 한다. 금전적인 손실을 따지기보다는 실험적인 시도를 즐기는 부류, 대세를 따르는 부류,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웬지 잘 따르려 하지 않는 부류, 등등.
오디오기기중에서는 CDP가 가장 기술발전이 빠르기 때문에 CDP를 구입, 업그레이드하는 행태에도 사람마다 차이가 많은 것 같고, 이를 보아 간접적으로 오디오 사용자의 기술수용태도도 점칠 수 있을 것 같다.
오디오메이커나 음반회사들이 디지털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대응하는 방식도 일반인과 다를 바 없다. 새로운 기술을 채택한 상품을 만들어서 기존에는 없었던 시장을 만들고자 하는 (또는 영역을 넓히는.) 회사, 입증된 기술만을 사용하여 안전하게 꾸려나가는 무난한 회사, 영향이 미미한 곳에 엄청난 공을 들이고 엉뚱한 주장을 펴 소비자를 혼란스럽게 하는 회사, 등등.
이번에 소개하는 ARCAM (A&R Cambridge)사는 그 중 온건한 방법을 채택해온 회사이다. 충직한 집사와 같은 스타일을 가졌다고 해야 할까, 소비자에게 불필요한 지출을 지우게 하지 않으려고 껍데기 치장에 드는 비용에는 인색하다. 보드의 교체를 통한 업그레드도 지원하는 등 항상 고객의 입장을 생각하는 회사이다. 반면에 80년대 말에 외장형 DAC를 출시하는 등 음질향상이 된다고 판단되는 부문에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dCS사 라면 디지털 기술보유에 대해서는 선두그룹에 드는 회사이고 기존의 멀티비트와 1비트 DA 변환방식의 단점을 모두 해결하고 양측의 장점만을 따낸 RingDAC을 개발했고, 자사의 DAC인 Elgar, Delius에 채택하여 전세계에서 높은 찬사를 받고 있다.
이렇듯 전체 분위기는 서로 달라보이는 두 회사 ARCAM과 dCS는 놀랍게도 1995년에 서로 기술제휴하여 RingDAC의 디스크리트 회로를 원칩화 하기로 하고 1998년에 완성시켰다. 이 칩이 처음 적용된 CDP가 ARCAM 9 CDP로 그 가격대에서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가격대의 CDP를 위태롭게 할만큼 음질면에서 탁월하다.
그러나 ARCAM 9 CDP는 소리만으로 봐서는 매우 훌륭하지만 디자인이 너무 튀기 때문에 구입을 하는데 좀 망서림이 생긴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필자뿐만의 생각이 아니라 ARCAM의 고객들도 마찬가지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ARCAM에서는 겉모습을 일신한 FMJ (Full Metal Jacket의 머릿글자를 딴 것이라고 알려졌다.) 시리즈를 만들어 냈고 ARCAM FMJ 23CD는 ARCAM 9 CDP의 개량판이다.
구성
당연한 얘기가 되겠지만 FMJ 23CD의 설계컨셉 대부분이 ARCAM CD9에서 물려받은 것이다. 파이버글래스 재질의 PCB, HDCD 디코딩 및 디지털 필터, RingDAC 칩, 아날로그 디바이스의 고성능 op amp, resampling, Sony CDM14매커니즘, ...
달라진 것은 당연히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외관의 변화다. ARCAM 9 CDP가 진 차림의 청년이라면 FMJ 23 CD는 알마니 한벌로 쫙 빼입은 듯한 모습이다. 모든 FMJ시리즈의 전면패널은 8mm두께의 알루미늄 합금을 곡면절삭하고 비드 블래스트로 처리하여 고운 질감을 내주고 있다. 몸체와의 일치성을 주기위해 트레이의 전면도 동일한 처리를 한 알루미늄합금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고품질의 마감이 가능한 오래 견디게 하기 위해 오븐에서 굽는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아마도 글자인쇄에 자외선 경화잉크보다 내마모성이 우수한 열경화성 마킹잉크를 사용한 듯 하다).
겉면만 아니라 샤시도 달라졌다. 두 겹의 금속판 사이에 특수 고무 폴리머를 넣은 적층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전샤시제작방식보다 4배 이상의 비용이 든다고 한다.) 그로 인해 기계적인 진동이 흡수되어 보다 미세한 전기신호를 다루는 내부의 부속들이 어떤 조건에서라도 최적의 성능을 유지할 수 있게 배려했다.
주기판도 새로 디자인했다고 한다.
또한 파워서플라이의 증가이다. 기존의 몰딩된 트랜스포머를 사용하는 대신 이보다 비싼 토로이드 트랜스포머를 사용했다. 토로이드는 기존형태의 트랜스포머들에 비해 적은 레벨의 험을 발생시키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이런 이유로 해서 많은 하이파이 제품들에 사용되고 있다. 디지털회로와 아날로그회로에 분리된 전원을 공급해 준다.
밸런스 출력은 갖추고 있지 않다.
리모컨은 검정색 플라스틱으로 전혀 바뀌지 않았다.
조작성
전원을 넣으면 오른쪽 상단에 작은 녹색 LED가 켜진다. 스위치의 크기는 작은편이어서 손가락이 무딘 사람이나 발가락으로 조작하는 분에게는 시원하게 눌리지 않을수도 있겠으나 조작감은 매우 부드럽다. 블랙 다이아몬드 피라미드 레이싱 콘을 바닥에 받혔는데도 버튼조작시에 기기가 밀리지 않았다. 전원이 들어와 있으면 사용을 하지 않아도 기기의 상판에서 미지근한 열이 나고 있다. 그렇지만 딜리어스처럼 뜨뜻한 온도는 아니다.
화면 디스플레이는 리모컨의 밝기 조정을 통해, 약간 어둡게, 정상, 꺼짐으로 설정할 수 있다. 꺼짐을 선택하게 되면 트레이를 열거나 닫을 때 그리고 각종 조작버튼을 누를 때마다 2~3초간 디스플레이를 보여주고 다시 꺼지게 되어 있다. 항상 CDP의 전원을 켜놓는 버릇을 가진 사용자는 디스플레이를 꺼놓고 있으면 전기 끄고 다니라는 식구의 잔소리를 면할 수 있을 것 같다. 리모컨의 남은시간 표시기능키를 사용하여 전체CD의 남은시간, 해당 트랙의 남은 시간을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인덱스 기능키는 없다. 트레이의 열고닫힘은 산뜻하고 안정적이다. 인식시간도 빠른 편이다. HDCD로 녹음된 음반을 걸면 트레이 좌측에 빨간색 LED가 켜지게 되어 있다.
음질
전체적으로는 딜리어스 DAC를 scale down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전 대역에 걸쳐 투명하고 개방된 소리를 내주어 오디오에서 소리가 삐져나오는듯한 느낌이라기 보다는 공기의 울림이 전달되는 듯 해서 마치 평판형 스피커를 연상하게 해준다.
우선, 전에 dCS의 딜리어스DAC를 집에서 들어봤을 때 중점적으로 시청해봤던 음반인 헤레베게가 지휘하는 바하의 부활절 오라토리오 (HMC901513) 2악장을 들어본다. 체크포인트는 목관악기의 소리의 질감과 입체적인 펼쳐짐이다. CDP의 중고역 재생특성이 뛰어나지 않을경우 목관악기가 뭉쳐진 듯이 소리가 나기 쉽다.
FMJ 23CD에서는 목관악기의 질감이 잘 느껴진다. 그리고 고역이 잘 트여진 소리여서 전혀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개방된 공간에서 듣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충실한 재생정보를 전달하고 있어 피어나는 듯한 자연스러운 소리를 재생시키고 있다. 그러나 딜리어스가 들려줬던 공간적인 재생능력에 약간 못미치는 것 같다. 딜리어스는 3차원적으로 소리가 퍼져나가는 녹음신호를 잘 표현해 주어 넋을 잃게 했었던 기억이 있다. 가격이 3배 차이인 기기와의 비교라는 점을 감안해 보면 흠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은 문닫은 A회사의 저가형 인기모델 DAC 풀세트로 동일 곡을 들어봤던 기억은 중역과 고역 전반에 걸쳐 음이 포화된 듯이 들려 가상의 음원에서 들린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고 스피커에서 쏟아져 나온다는 느낌이 강했다.
고역의 재생소리에 문제가 있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 심벌즈의 소리를 들어보았다. 시청음반은 Steve Davis Project의 1번 트랙, The Quality of Your Silence (dmp CD-522)와, Joe Morelo의 going places앨범중 5번 트랙 Topsy (dmp CD-497)다.
CEC2100으로 재생해 보면 심벌즈의 소리가 자연스럽지 않고 굵고 번진 듯이 들려 사실적인 소리에서 멀어져 있다. FMJ 23CD는 이와는 달리 좀 더 사실적인 심벌즈에 가깝다. 그러나 역시 딜리어스가 좀 더 사실적인 재생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FMJ 23CD와 딜리어스 사이의 차이란 것이 거의 표시나지 않았다면 CEC2100과 FMJ 23CD와의 차이는 매우 컸다.
HDCD를 테스트해 보기 위해 XLO Reference Recordings Test & Burn-in CD (RX-1000)의 17번 트랙 Franz Biebl작곡의 Ave Maria 합창곡을 들어본다. 역시 전 대역에 걸쳐 개방된 느낌이 들어 오디오에서 나오는 갑갑한 소리라기 보다는 실연에 가까운 듯한 인상을 준다.
일렉트릭 기타를 들어보기 위해 Eagles의 Hell freezes over앨범 중 6번 트랙 Hotel California를 들었다. 관객의 박수소리가 상당히 리얼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중역대에서도 잘 열려진 소리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고 기타줄이 진동하고 있다는 것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보컬은 의도적으로 부드러운 표현을 하고 있다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소리를 내어준다는 느낌이 든다. 킥드럼 재생의 경우 해상력과 다이나믹 레인지 재생에 문제가 있는 CDP에서 흔히 딱딱하고 단조롭게 들리기 쉬운데 FMJ23CD에서는킥드럼의 소리재생도 딱딱하지 않게 단조롭지 않게 재생하여 막이 울리고 있다는 것을 잘 감지하게 해주고 있다.
대편성에서의 파워를 어떻게 처리해 주는지 알아보기 위해 하이팅크 지휘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1번(1905년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피의 일요일” 사건을 소재로 한 곡)의 2악장을 들어보았다. 8분 경과되었을 때의 용암이 분출하는 듯한 뜨거운 오케스트라의 소리는 보급형 CDP에서는 아예 다른 음들과 뒤범벅되어 녹은 엿처럼 서로 엉기게 되어 정상적인 재생을 기대할 수 없다. CEC2100은 op amp를 교체한 것이어서 그 부분에서 뒤범벅된다거나 거칠어지는 소리는 발생하지는 않았으나 op amp의 교체가 고질적인 문제를 다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고역은 포화된 듯이 들려 갑갑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음량을 크게해서 듣다보면 괴로운 심정이 든다. 음악 자체가 심각한 민중봉기를 다룬 것이어서 정서적으로도 상당한 스트레스를 주는 것도 있겠지만 요란한 타악기군와 금관악기의 포효를 듣다보면 귀가 피곤한 것은 사실이다.
FMJ23CD로 들어보면 그런 괴로움이 완전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의외의 결과에 당황되어서 다시 한번 들어보았는데 마찬가지였다. 연주회장에서는 요란한 곡을 듣더라도 짜증을 동반한 괴로움이 느껴지는 법은 없는데 그런 면에서 상당히 실연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이런 느낌은 다이나믹레인지가 큰 불레즈 지휘 스트라빈스키 “불새” (DG 1378) 13번 트랙 “카스체이 일당들의 흉악한 춤” 에서도 마찬가지로 전혀 귀가 괴롭지 않았다. 깨끗한 배경에 작은 음량과 큰 음량이 대비가 잘 재생되었다.
현악기의 질감을 들어보기 위해 보로딘 트리오가 연주한 드볼작 피아노트리오 둠키 (CHAN 8445)를 들어본다. 활의 마찰로 인해 첼로의 몸통이 울어대는 것이 쉽게 연상이 된다.
피아노의 표현을 보기 위해 에프게니 키신이 연주한 쇼팽 전주곡과 피아노소나타 2번을 (BMGCD 9G91 09026-63535-2)들어봤다. 방 밖에서 소리를 들은 아내왈 “이해할 수가 없어. CD플레이어만 바뀐다고 소리가 그렇게 달라진다니” 음악전공자들이 그렇듯이 웬만해서는 오디오에 대해서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는데 이번에는 복잡한 피아노의 공명을 제대로 표현해 주어 모처럼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맺음말
FMJ 23 CD는 만사가 다 귀찮아지는 찜통 더위에도 불구하고 리뷰하는 기간 내내 음악을 듣는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준 제품이었다.
그리고 필자의 시스템 밑천을 다 드러나게 해주는 기기였던 것 같다. 필자가 이 기기를 구입하게 된다면 (그럴 수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 스피커 케이블을 다른 것으로 좀 바꾸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버브라운 계통의 op amp를 선호하는데 이 제품은 아날로그 디바이스 계통의 소리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시기상으로 CDP를 업그레이드 해야 하느냐 고민하실 분들이 많을 듯 하다. 한정된 일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제 소리를 내주지 못하는 CDP를 끼고 견딘다는 것은 돈을 아낀다고 보기 힘들 것 같다.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소중한 시간들과 음악과 가까워 질 수 있는 기회들을 생각해 보면...
영국에서의 ARCAM 9 CD와 FMJ 23CD간의 가격차이는 잘 모르겠고, 미국에서의 차이는 500불이라고 한다. 단순히 껍데기 치장만으로 치부할 수 없는 차이점이 있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가격차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국내에서는 중고 메리디안 508.24을 구입할 수 있는 비용보다 좀 더 내야 구입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중고 메리디안 508.24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인 점과 제품크기가 다른 크기들에 비해 튄다는 점, 그리고 고장우려가 있는구동부를 가진 CDP를 중고로 산다는 것이 꺼림직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신품구입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기기라고 생각된다. 이정도 지불능력이 되고 음악을 좋아하는 애호가라면 반드시 한번쯤 들어볼 것을 권한다.
사용기기
CD Player : CEC2100 개조품 (op amp교체: OPA627모듈, 클럭교체: TCXO형)
Interconnect : Transparent Musik Link
accessory : 금강 diamond blue 전원케이블, Black Diamond Racing Cone - Type3
Amplifier : Goldmund SRI integrated
accessory : 금강 diamond blue 전원케이블, Black Diamond Racing Cone - Type3
speaker cable : Kimber 4TC + 8TC bi-wire
Loudspeaker : Celestion SL600si
accessory : 삼일 마천석 스탠드, RPG 어퓨저 2개
알림
2000년도 9월부터 가격이 합리적으로 조정되어 200만원을 전후하여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원산지의 가격을 고려해 볼때 (1,100 파운드)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가격조정이 이뤄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적극 추천한다.